1699년 지방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무공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습니다.
경주 남산 고위봉(高位峰) 서남쪽 자락에 있습니다.
1711년 숭렬사(崇烈祠)로 사액되자 유림들이 뜻을 모아 용산서원으로 이름지었습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03년부터 다시 유림들이 설단(設壇)하여 향사 지내오다가 197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3칸의 숭렬사우(崇烈祠宇)가 가장 위쪽에 있고, 그 앞에 8칸의 용산서원 민고당(敏古堂)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신문(神門)이 있습니다.
용산서원과 숭렬사우 편액은 옥동(玉洞) 이서(李潊)가 썼습니다. 그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으로 <동국진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들어낼 정도로 당대 최고 명필이었습니다. 형이 편액 글씨를 쓴 인연으로 용산서원의 기문은 동생 이익이 썼습니다.
숭렬사우에는 정무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서원 강당인 민고당에는 가운데에 넓은 마루와 양쪽에 협실 흥인재(興仁齋)와 명의재(明義齋)가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이 흥인재(어진 마음을 흥하게 하는 방), 왼쪽이 명의재(의로움을 더욱 밝게 하는 방)인데, 방 이름에 깊은 뜻을 담았습니다. 이 방에서 공부하는 서원 유생들이 어진 마음과 의로운 기상을 갖도록 이름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고당 역시 "옛 사람들의 명민함을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 강당이 그러한 장소가 되도록 이름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민고당은 현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청풍루(淸風樓)는 서원철폐령 이전 모습 그대로 2022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정문 역할을 했던 식강문(植綱門)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청풍루의 청풍의 의미는 청백리 정무공과 관계있는 바, 청백의 전통이 더욱 풍성하게 진작되리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청풍루 앞에 서원과 역사를 함께한 삼백년 된 회화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는데 경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외 3칸의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고사(庫舍), 포사(庖舍), 유사실(有司室) 등이 있습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사와 유사실은 서원의 고지기와 유사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 후 일요일에 향사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입니다. 유물은 문헌 500여 권과 잠와실기(潛窩實記) 목판본 200여 점이 있습니다.
용산서원(龍山書院)
명필 옥동(玉洞) 이서(李潊)가 쓴 용산서원과 숭렬사우 편액
上: 흥인재(興仁齋) 下:명의재(明義齋)
上: 청풍루 편액(외부) 하: 청풍루 편액(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