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루 기 (淸風樓 記) 승지 정범조
숙종 기묘년 경주의 인사들이 정무공의 사당을 부남 용강의 기슭에 세웠으니, 신묘년 묘호를 숭렬로 내려 주시었다. 금년 갑오에 공의 오세손 종겸(宗謙)이 고을인사들의 말로써 와서 불민한 나에게 부탁하되 그 묘전의 청풍루의 기를 청하였다. 대저 생과 의의 경하고 중함을 살피고 요량하여 몸으로써 강상의 중함에 따라 죽음은 청덕의 선비가 아니면 능히 못할지라。공자는 이르시기를 「더러운 지아비는 가히 더부러 임금을 섬기지 못하겠다 하시었고, 고죽군의 두 아들(백이와 숙제)이 굶어죽어 순절하였으매 맹씨(맹자)는 써 이르시기를 「성인의 맑은 이라」하시었음이 까닭이 있었음이겠지?
인조 병자년 북호가 갑자기 이르매 모질고 빠르기 풍우 같아서 임금의 거둥이 에워진 성중에 계신데, 여러 성진들이 둘러서 보고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공은 나이 육십이 훨씬 넘은 공주영장으로써 군사를 거느리고 본도 감사 정세규를 좇아 난에 달려가니, 정공이 그 늙었음을 민망히 여겨 다른 장수로써 바꾸었으나 공은 강개히 앞서 올라서 칼끝에 몸을 맡겨 당시 충의의 선창으로 되었으니, 가히 열렬한 대장부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대개 또한 기른 바 있어서 그러함이라. 공은 본디 무(武로)써 출신했지만 시(詩)와 서(書)를 일삼아 익혔고 염결한 덕을 지녀서 그 의가 아니면 한 낱도 취하지 않아 오랜 객지에서 홀로 거처하던 때에 여색을 물리치고 춥고 얼어붙은 절후에 털옷을 물리침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소중랑(한무제의 명령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 억류되었다)의 눈 굴 속 절조보다 지나치기 멀리 더하였다. 군자가 이르기를 공의 용기를 낸 절개는 곧 그 염결한 덕에서 우러나옴이라 하였음이 정말 말할 줄을 아는 것이라。비록 그러하나 공의 정충대절은 본디 이미 역사에 빛나고 천지에 뻗쳐 부인과 어린애까지 공공연히 외우는 바이지마는 홀로 그 사양하거나 받거나 취하거나 주거나 하는 마음속으로 달며 재며 한 것은 후세의 자세히 알 바 아니니, 마땅히 표하여 나타내어 루의 호를 청풍으로 걸만하다.
대저 바람의 느낌은 본디 깊으며 그리고 맑고 굳센 바람은 더욱이 심하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사람이 물체의 감화를 입는 것을 비유하여 「깨끗하기 맑은 바람 같다」일렀으니, 후세 사람들이 공의 묘정에 절하고 물러와 이 루에 올라 맑은 바람을 거슬러 거닐면 서늘한 얼음과 황경나무의 가슴에 쌓여 눈서리의 머리털을 씻은 듯하여, 곧 그 탐심을 씻고 인색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서 그 염결한 성질을 감발하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의리는 중하고 목숨은 가벼움을 알아 나라 형편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 바치는 절개를 본받으면 곧 그 맑은 바람의 감동됨이 어찌 깊고도 넓지 않겠는가? 삼가 기(記)를 한다.
*정범조(丁範祖)는 영조,정조 때의 문신. 동부승지를 지낸 적이 있다.
淸風樓記 承旨 丁範祖
肅宗己卯。慶州人士立貞武公廟於府南龍崗之趾。辛卯。賜廟號崇烈。今年甲午。公之五世孫宗謙以州人之言。來屬不侫。請記其廟前淸風樓者。夫審度生與義之輕重。而以身殉綱常之重者。非淸德之士弗能也。孔子謂鄙夫不可與事君。而孤竹二子餓死殉節。則孟氏以爲聖之淸。有以也哉。仁祖丙子。北胡猝至。剽疾若風雨。乘輿在圍城。而列鎭環視莫敢動。公年六十餘。以公州營將。領軍從本道伯鄭公世䂓赴難。鄭公愍其老。易以他將。而公慷慨先登。委質鋒鏑。視一死如歸。爲當時忠義之倡。可謂烈丈夫哉。而蓋亦有所養而然爾。公固以靲鞱發身。而服習詩書。秉德廉㓗。非其義一介不取。至若屛女色於旅曠之日。却毛具於寒沍之候者。過蘓中郞雪窖之操遠甚。君子謂公立殣之節。迺其廉德之推。誠知言也。雖然。公之精忠大節。固已光簡冊而亘天地。媍人孺子所公誦。而獨其辭受取與之權衡心術之內者。非後世所得而詳。則宜其表而顯之。揭樓號以淸風也。夫風之所感也固深。而淸介之風尤甚。故詩人喩被物之化而謂之穆如淸風。後之人拜公之廟庭。而想慕其節義。退而登斯樓也。遡淸風而徘徊。而淅然若氷檗之貯懷。雪霜之灑髮。則其有不滌貪消吝而感發其廉潔之性者乎。由是而知義理重而軀命輕。當國家板蕩之秋。而効見危授命之節。則其爲淸風之所感也。詎不深廣矣乎。謹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