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慶州 崔氏)는 우리나라 최씨(崔氏) 가운데 가장 큰 문중입니다. 경주 최씨는 신라 돌산고허촌(사량부)의 소벌도리(蘇伐道利) 촌장이 원조(元祖)가 되며 그의 24세손이며 신라 말 대문장가(大文章家)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시조(始祖)가 됩니다.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데, 많은 다른 본관의 최씨(崔氏)들이 최치원 선생의 선대(先代) 또는 후대(後代)에서 분파(分派)되었습니다. 최씨는 신라시대 귀족이 아닌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속에서 활동했으나 신라 말기에 그 잠재력이 폭발하게 됩니다. 최치원(崔致遠) · 최승우(崔承祐) · 최언위(崔彦撝) 세 사람이 모두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그곳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그 시대 최고의 인재로 활약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세 사람의 명성을 1대 3최(一代三崔)라는 말로 당대 최고 인재들이 모두 최씨였던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주 최씨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선생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현(名賢)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중국 장쑤성 양저우(揚州) 시(市)는 2005년 중국 외교부로부터 최치원기념관 설립을 허가받아 2007년에 개관 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설립한 유일한 외국인 기념관입니다.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토벌할 목적으로 쓴 <토황소격문>은 황소가 읽고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생겨날 정도의 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은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데 기여한 공으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는 비은어대와 자금어대를 받았습니다. 그후 신라 헌강왕 때 귀국하여 당에서 배운 지식과 견문을 바탕으로 쇠퇴해 가던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비록 진골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민중들을 위하고자 정신은 백성들로부터 많은 공감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많은 발자취를 남겼는데, 지금까지도 전국 곳곳에 선생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당이 스무 곳이나 됩니다. 심지어 최근에도 전국 여러 곳에 선생의 삶과 사상을 테마로 한 기념관이나 수련원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경주崔氏 정무공파(佳巖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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