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정려비문과 해석
정려비문과 해석

충신증병조판서최공정려비(忠臣贈兵曹判書崔公旌閭碑)  

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최공(崔公) 정려비명 서문 병기하다.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 황호(黃㦿)가 찬술하였고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 신익전(申翊全)이 글씨를 썼으며, 자헌대부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 김광욱(金光煜)이 전액을 썼다. 

오호라. 이것은 고() 참판 최공(崔公)의 정려문이다. 임금께서 정려문을 세울 것을 명하니 그의 고향 사대부들이 이 문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영원히 기념하도록 도모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의 의열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그 청렴한 기상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니 어찌 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을 돌아보건대 절개를 지키며 죽은 신하를 평상시 그 임금이 잘 알지 못한다. 임금도 그 인물을 잘 알지 못해서 슬퍼했는데, 지금 공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임금 신하의 관계를 보게 되었으므로 가히 밝혀 기술하기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임금께서 계해년에 반정을 일으킨 후 옛 주()나라 정치를 본받아서 문신과 무신들의 공적을 다시 변별하여 단정하게 하시며, 잊혀졌던 공을 일으켜서 덕진첨사에 제수하셨다. 어사 이경여(李敬輿)가 포상할 것을 청하여 임금께서 나라에 속한 말을 하사하시기도 했다. 병인년에는 경흥부사에 제수하여 임기를 마치자, 기순변사 우치적(禹致績)이 순찰사 이명(李溟)에게 포상할 것을 아뢰어 그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보니 꼿꼿하고 높은 절개 가상하여 임금께서 옷 겉감과 안감 한 벌을 내리셨다.

어사 이행원(李行遠) 이 돌아와서 공의 청백을 매우 상세히 아뢰었고 정승 윤방(尹昉)과 김류(金瑬)가 번갈아 추천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경오년 여름 임금께서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에 제수했다가 아직 부임하기 전 가을에 특별히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했다. 조정 제도에는 아경(亞卿)에 무신(武臣)을 임명하는 것은 드물다 하여 공이 사양하자,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계해년 이후로 나라 안에 모든 이의 생각을 고치고 바꾸려고 했으나 더러움이 깊이 물들어 고치기 힘들었다. 경()만이 홀로 염치있고 청렴하게 백성을 사랑하니 심히 가상히 여겨 내린 아경 직책은 경에게 실로 합당하다"고 하셨다. 겨울에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제수하며 임금께서 불러 만나 장려하니 청렴한 자를 얻어 수사(水使)로 삼았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계유년에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하게 하셨지만 공이 사양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내려 “나는 경이 재물를 좋아하지 않고 염치 있고 성실하여 임명하니, 경은 이 뜻을 알기 바라며 사양하지 말고 직분을 다하라고 하셨다. 갑술년에 다시 전라우수사 제수하고 임금께서 또 불러 만나 위무하셨다. 보통은 신하가 임금의 알아주심을 스스로 알 길이 없지만 임금께서 공을 알아주신 것이 틀림없음은 임금께서 공을 이렇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염치있고[廉簡], 청렴하고[淸簡], 근면하다[廉勤하셨는데, 큰 정승이나 으뜸되는 공신일지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하나라도 완전히 인정받은 이가 있었겠는가?

병자년 가을 부대의 정리를 위해 공을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옮기게 했더니, 겨울에 북쪽 후금 군대가 쳐들어 와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 공과 순찰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아갔는데 세규가 공에게 이르기를 공의 나이 지극하니 다른 장수로 바꾸겠다 하고 공을 물러나게 했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포위돼 있는데 노신(老臣)이 감히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내가 늙어 장군을 맡을 수 없다면 행군을 맡을 수는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말에서 뛰어내려 피눈물을 흘렸다. 군대 안에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감동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대가 용인 험천에 이르렀을 때 적의 철기병[鐵騎]들이 우리 군대를 공격하여 짓밟았다. 오직 공 한 사람만이 서서 활을 쏘며 대적하니 쏘는 대로 적군이 죽어 넘어졌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무너지니 공을 따르는 자가 상황이 급하다고 아뢰자 내 죽을 곳은 이곳이다”라고 하시며 드디어 그곳에서 죽었다. 다음해 정축년이 되어 시체를 찾았는데 그 모양이 살아있는 듯했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있었다. 아아! 누구인들 신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은혜와 덕택에 젖어 녹과 벼슬을 마구 취한 자들은 새 숨듯, 쥐 숨듯 한다. 무릇 신하가 평소 이익만 보고 의를 보지 못한다면 급하고 어려운 때에 살 줄은 알아도 죽을 줄 모를 것이 뻔하다.

오직 염치있는 사람들은 구차하게 살지 않고, 오직 깨끗한 사람들은 절개에 죽을 줄 아니 임금께서 공을 깊이 알아주셨다. 지난번 공의 한번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하늘 이치가 갑자기 사라졌을 것이며, 싸워 적을 좀 물리쳤다 한들 그 공로가 이 한번의 죽음보다 더하랴? 임금께서 알아주심에 보답한 바도 실로 가볍거나 적지 아니하다.

일이 점차 안정되어 공의 옛 부하들이 공이 적에게 죽은 과정을 상소로 올리니 예조 관리들의 의견을 들어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에 증직하고, 경상도에 명령하여 장례를 챙기고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예절대로 지내게 하였다.

예조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차()를 올려 말하기를, “그가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는 뜻은 본디 마음속에 정해 놓은 것이니 갑작스레 전사한 사람들과 비할 것이 아닙니다. 문을 세워 그의 충성을 드러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정려를 세우라는 어명이 있었다. 정세규도 임금을 뵙고 이일을 아뢰니 그 아들 동량(東亮)에게 관직을 내릴 것을 명령하셨다. 아아 지극하구나. 임금의 은혜는 시종 변함없으니 여기에서 본래의 임금 신하의 관계를 볼 수 있다 함이 아니겠는가?

공은 성이 최(), 휘가 진립(震立)이며 자(字)가 사건(士建)이고 계림(경주) 사람이다. 애초에 공이 벼슬없는 선비였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붓을 놓고 의병을 모아 지혜로 적을 무찔러 베어 죽인 바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공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으므로 포상되지 않았다. 갑오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정유년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을 따라 서생포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도산(島山-울산성) 싸움에서 양호(楊鎬)가 공의 이름을 본디 알고 있었으므로 공을 곤궁한 데에서 구하였다. 전투 후에 창상을 입고 뼈를 긁어낼 정도였으나 기운을 더욱 떨치니 사람들이 그 용기에 감복하였다. 경자년 선조께서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힘껏 싸운 병사들에게 좋은 음식을 베풀며 위로함에 공도 그로 인해 대궐에 나아가 선조에게 예를 드리게 되었다. 임금께서 감탄하고 특별히 더 물어보시며 좋은 술과 화살을 내려주시며 수령에 제수하도록 명령하셨다. 이 일은 우리 선조께서 공의 재목을 배양하셔서 뒤를 도모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무신년에 마량진첨사에 제수되어 업적을 드러내니 도의 관찰사가 듣고 아뢰었다. 신해년에 경상좌도 수군우후에 제수되어 치적이 마량(馬梁)에서 보다 많아 또 조정에 보고되었다. 명나라 황응양(黃應暘)이 왜적을 정탐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의 준비를 보고 자주 청렴함을 일컬었다. 갑인년에 경원부사에 제수되어 처음 통정대부에 이르렀는데 북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공의 청렴함을 말하고 있다. 신유년 평안도에 근무할 때 죄 아닌 일로 죄를 입어 울산에서 귀향살이로 두 해를 보냈다. 그러다가 우리 임금을 만나게 되었다. 이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평생 스스로 이룩한 바 이같이 크고 우뚝하며 또 만년에 큰 운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끝내 병권이 주어지지 않아 그 업적 크게 베풀지 못했으니 어찌 시대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융경 무진년에 태어나서 숭정 병자년에 돌아갔으니 수명이 예순아홉이라. 언양현 동쪽 오지연(烏池淵) 묘향의 산에 장사지냈다. 공은 판서 이시발(李時發), 권반(權盼), 참찬 윤의립(尹毅立)과 서로 뜻이 맞은 친구로 지냈고, 참찬공(參贊公)은 나에게는 외왕고(外王考-외조부)가 되므로 곁에서 공의 유풍(遺風)을 일찍이 듣고 그 실마리를 받들어 공의 우아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다만 그 맑고 충성스런 큰 절개 제일로 서술하여 이곳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숙여 절하게 하고자 한다. 어찌 감히 더 필요없는 말을 덧붙여 명을 말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충신의 정려로다.

오호라,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 황호(黃㦿)가 찬(撰)하였다.

 

有明朝鮮國故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崔公旌閭碑銘並序

嗚呼此故參判崔公之門上命旌以綽楔而其鄕之大夫士樹之貞珉爲不朽圖者不佞㦿則謂公之義烈晣如日星精爽蔽於霄壤又奚用鐫泐爲顧往昔伏節之臣居平不見知于其主主亦不知何狀君子傷焉迺今于公觀君臣矣斯可無述繄我聖上癸亥改玉之初倣周官六廉之政而弊文武臣之治疇能敬辨以興于俗遂起廢公爲加德鎭僉使旣至御史李敬輿啓褒淸勤上賜內廏馬丙寅拜慶興府使及期巡邊使禹致績啓褒巡察使李溟啓覈其實苦節可尙上賜表裏一襲又御史李行遠還奏公淸白甚悉相尹昉金瑬交口慰薦上特陞嘉善階庚午夏上特除全羅道右水使未赴秋特除工曹參判朝制亞卿鮮以武弁選公辭上批曰癸亥以後國中皆思改心易慮而染汚旣深獨卿廉簡愛我民生予甚嘉尙所授亞卿之任卿實合宜特除京畿水使上引見勞獎而曰得淸簡者爲帥予無憂矣癸酉兼三道統禦使公辭上批曰予不肩好貨廉勤敍欽卿知此意勿辭盡職甲戌再除全羅道右水使上又引見慰諭蓋公之自結上知亡它而上所以待公如此其曰廉簡淸簡廉勤者雖大相元功有能得一于上哉丙子秋朝廷爲飭兵遷公公州營將北敵大訌上駕次南漢公與巡察使鄭世規將帥師赴難而世規謂公年至易以他將且使公後公奮曰君父在圍之謂何而老臣敢圖生爲吾老不任將能任行耳迺躍馬顔行慷慨血泣軍中見者莫不洒然感激軍至龍仁險川敵以鐵騎躙公獨立射射輒殪敵軍潰從者以急告公曰吾得死所矣遂死之明年丁丑得屍貌如生身蝟集矢鏃孰非臣子而涵濡渥澤貪饕祿位者率鳥鼠竄矣夫人臣平日見利而不見義方其急難知生而不知死固爾惟廉者不苟生淸者能殉節即上之知公深矣向非公一死者天理不遽熄而人心不長晦哉雖戰勝剋敵其功何以加此公所以報上知者實不淺尠也事稍定舊部曲疏陳公死敵狀上用禮官議特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命本道庀襄事遣官致祭如禮判書金時讓上箚以爲其爲國捐生之志素定於胸中非倉卒戰死者比請表其門於是有旌閭之命鄭世規因登對白之又命官其子東亮於乎至矣上恩終始靡替此所謂觀君臣者非耶公姓崔諱震立字士建鷄林人始公爲布衣時當壬辰島夷之難投筆糾儀旅出奇剿賊所斬殺甚衆不言功故賞不及甲午中武科丁酉從元帥權慄戰于西生堡有功島山之役楊經略鎬素知公名救公于戹先後戰被創刮骨而氣益振人服其勇庚子宣廟遣御史犒力戰壯士公因詣闕謝宣廟特加咨訪就賜上尊弓矢命除守令寔我宣廟栽培公材以燕貽後歟戊申拜馬梁鎭僉使大著厥績道臣以聞辛亥拜慶尙道左水虞候績多于馬梁又聞于朝黃指揮應暘從偵賊還亟稱公淸白甲寅拜慶源府使始陟通政北人至今誦氷檗聲辛酉從戎關西坐非罪謫蔚山二年而遇我聖明論者謂公平生所自樹立若是其魁傑而又晩歲遭際大奇竟不授之兵柄而有所施者豈關諸時運歟公生于隆慶戊辰歸于崇禎丙子壽六十九葬在彦陽縣東烏池淵卯向之山公嘗與判書李公時發權公盼參贊尹公毅立許以知己參贊公於不佞㦿爲外王考側聞遺風而奉緖論雅矣第最其淸忠大節而爲之敍俾後之過者而式而拜曷敢以贅語銘銘曰有明朝鮮國忠臣之閭嗚呼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黃㦿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