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名臣錄 潜谷金公堉所撰— 해동명신록. 잠곡 김육 지음
공의 자는 사건이오、경주 사람이니,세계는 신라 사량부에서 나왔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성 예(汭)가 청백으로써 나타났으니 공에게 육대조 되며, 부친 신보(臣輔)가 정언 황정(黃玎)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융경 무진년에 공을 낳았다。세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열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련하게 어리고 작건마는 효성이 하늘에서 심어져 슬퍼하고 수척해져서 어른 같았다.
임진년 란에 공이 아우 계종과 함께 경주부 판관 박의장을 좇아 행간에 있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공의 집이 경주부 남쪽에 있었는데 적 수십, 또는 백여 명이 그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이 부윤 윤인함에게 이르기를 “여기서 남촌으로 가는 길가에 조상님의 폐가가 있는데 적이 거기에 모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둔하고 겁이 많지만 청하건대 먼저 시험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부윤이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공이 밤에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문을 막고 바람결을 타서 불을 놓았다. 적이 다 타져 죽고 지붕 위로 또는 틈새로 나오는 자들을 활로 쏘아 살아난 자가 없었다. 조총과 창검들을 획득하여 관청에 실어가니 부윤이 탄복했다. 고을 사람들도 담대해져서 빠짐없이 나오니 공을 좇아 적을 치기 원하는 자 거의 오천 명이나 되었다. 동시에 모집에 응한 김호(金虎)와 함께 언양 경계에 매복하여 아주 많은 적을 베고 잡았다。승리의 기운을 타고 나아가 노곡에서 적을 만나 깨부쉈다. 계연의 전투에 다다라서 김호가 탄환에 맞아 전사했는데 공이 꺾이지 않고 더욱 힘껏 싸웠다. 이렇게 들어오는 네 군데 요충을 막는데 힘입어 경주는 별 탈 없게 되었다. 공로를 보고할 때에는 전투원들에게 모두 양보해 주었으므로 포상은 미치지 않았다.
갑오년 무과에 올라 부장을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정유년 적이 다시 쳐들어왔다. 공이 죽음을 각오한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서생포의 적을 쳐서 쏘아 죽이니 셀 수가 없었다. 공도 역시 배꼽 밑에 탄환을 맞았으나 낯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해 겨울 명나라의 경략 양호가 도원수 권율 함께 도산성(울산성)의 적을 치게 되었다. 이때 박의장이 경주 부윤으로 출전했는데 공을 시기하여 죄를 범한 것으로 모함했다. 장차 공을 베려 하는데, 경략이 본디 공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구명하여 방면되었다. 공이 분해서 이르기를 “내 그 죄 없이 죽기보다는 차라리 나랏일로 죽는 편이 낫다”라며 적진으로 말 타고 달려들었다. 탄환이 오른 뺨을 꿰뚫고 얼굴에 박혔는데, 돌아와 뼈를 깎아 탄환을 빼내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다 했다. 무술년 선무원종 공훈을 받아 훈련원정으로 제수 받았다。체찰사 이덕형이 힘껏 싸운 장사들에게 크게 상을 주면서 사나운 말 한 마리를 가려 공에게 주니, 사양하며 이르기를 “적에게서 들어와 관청에 속한 것이니 의리에 감히 받지 못하겠다”하니 정승이 깊이 감탄하며 칭찬했다.
경자년 임금께서 어사를 보내 경주와 울산에서 싸운 장수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격려하며 포상하셨다. 공이 여러 장수와 함께 대궐에 나아가 감사 인사를 드렸다. 임금께서 불러 문 밖에 이르게 하여 적을 토벌한 과정과 지금 당장 급히 할 일을 물었다. 공이 펼쳐 답변하여 아주 소상하게 아뢰었다. 임금께서 아름답게 여기시어 술을 주시면서 활과 화살을 하사했다. 여도만호겸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미년 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어 비로소 직책을 맡았다. 무신년 마량진첨사에 제수되어 명성과 공적이 크게 드러나, 신해년 경상도우후에 제수되었다. 갑인년 경원부사에 제수되어 통정에 오르니, 지조를 가다듬고 더욱 굳게 하여 빙옥 같다는 명성이 있었다。임기가 차서 돌아오다가 경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판관 이윤우(李潤雨)가 이름난 기생을 꾸며 공을 모시도록 했다. 두 달이 되도록 마침내 돌아보지 않으니, 윤우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악무목(송나라 악비)도 어찌 이보다 더하랴”라고 했다. 병사 김경서(金景瑞)가 공의 털옷이 낡았음을 보고 담비가죽으로 새 털옷을 만들어 이임 선물로 주었으나 공은 받지 않았다. 경신년 찬획사 이시발이 평양에 진을 펴고 있을 때, 공을 별장으로 삼아 무사 이백명을 거느리고 양책역에 주둔하게 했다. 후금 병사들이 갑자기 돌진해오자 공이 부하와 맹세하여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면 마땅히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라고 했다, 후금 병사들은 명나라 군사들과 싸우고 우리 진영으로 오지 않고 갔는데, 접반사가 조정에 잘못 보고했다. 공이 심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말했으나 울산으로 귀양가게 되었다.찬획 이시발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최장군이 너무 청렴하게 근무해서 가난하니 반드시 옥중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라며 군대 안에 있는 옷감을 보내니, 이를 사양하며 “나는 죄가 중한데 어찌 감히 관청의 재물을 받겠는가!”라고 했다.
계해년 반정으로 방면되어 돌아와 가덕진첨사에 제수되었다.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어사로 되었을 때, 공이 지극히 청렴, 근면하다 아뢰어 임금께서 나라에서 기르던 말을 특별히 주셨다. 다음해 경흥부사에 전임되어 갔더니, 감사·병사·어사가 모두 다 포창해 줄 것을 보고하니 명하여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경오년 가을에 특히 공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경기수사에 제수하고 임금께서 대궐에 나오게 하여 위로하며 이르시기를 “청렴하고 간소한 이를 얻어 경기의 방어를 맡기니 나는 근심 없겠다”라고 하셨다.임기가 다하자 군인과 백성들이 공을 더 유임시켜 달라고 청원하여 삼도수군통어사를 겸직하도록 명하셨다. 여름에 부총관으로 옮겨 갔다. 갑술년 전라수사에 제수되어 임금께서 대궐에서 보시고 더욱 격려하여 보내셨다.
병자년 조정에서 남쪽을 다스리는데 우려가 있어서 공을 공주영장으로 삼았다。수개 월 뒤 남한산성에서 임금께서 포위되셨다.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를 거느리고 임금을 구하려 달려가려 할 때, 공의 나이 늙었음을 민망히 여겨 황박(黃珀)으로 대신하게 하니, 공이 슬퍼하며 이르기를 “내 늙어서 장수 소임은 맡지 못하나 능히 행군은 감당하리라.“고 했다.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좇아가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용인 험천에 이르러 감사는 뒤에 있고 공은 앞에 있었는데, 철기병의 형세가 비바람 같아서 우리 군대 안에 사람 기색이 없어졌다. 공이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는데, 빗맞는 화살이 없었다. 화살이 다되자 따르던 자들을 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으리니 너희들은 그렇게 알아라.“ 일이 그렇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그곳에서 공의 시체를 찾았다. 화살이 빼곡이 박혀 고심도치 털 같았고 낮 빛은 살아 있는 듯하였다. 죽을 때 나이 육십구 세.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무이다. 정려를 세워 표창되었다.
○ <해동명신록>는 우리나라 명신(名臣)들의 전기를 모은 책이다. 저자인 영의정 김육은 청풍 김씨이며 호는 잠곡(潛谷),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수록 명신 수와 책 권 수는 저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계명대 소장본에는 302인으로 권1에 설총, 최치원 등 통일신라시대 인물부터 권9에 김응하, 최진립 등 조선시대 인조 때 인물까지 302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김육 평전 (민음사, 이헌창 저) 438쪽
-------김육은 최진립(崔震立)의 청백(淸白)과 순절을 포상하고 증직하고 남정유(南挺蕤) 부자와 김효남(金孝男)의 부인을 정려(旌閭)하고 한순(韓楯)의 사절(死節)을 포상하여 녹공하고 김덕함(金德諴)과 정홍익(鄭弘翼)에게 시호를 내리자고 의견을 올렸다. 1658년 조복양이 경연에서 김덕함과 정홍익의 시호를 내리기를 건의하자, 효종이 대신의 의향을 물어 김육이 의견을 올린 것이다. 1659년 김덕함과 정홍익에게 시호를 내렸다※. 이들 중 이순신, 원호, 황진 및 최진립은 『해동명신록』에 올랐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순절한 최진립에 대해 김육은 “무릇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을 내림에 있어서는 단지 그 사람이 의를 행하고 공을 세운 것만 볼 뿐입니다. 어찌 그 사람의 지위가 높고 낮은가나 문관으로 발신(發身)하였느냐 무관으로 발신하였느냐를 따지겠습니까. 최진립이 세운 공을 보면 비록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과 청백리의 선발에 참여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라는 의견을 올렸다. 무장인 최진립의 후손은 선조의 향사 사액을 발판으로 경주의 유수한 사족 가문으로 성장했고, 그 후손 가운데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 가문이 출현했다.
※효종실록 9년 5월 3일 己亥(1658), 10년 2월 26일 丁亥(1659), 10년 윤3월 18일 戊寅(1659)
海東名臣錄 潛谷金公堉所撰
公字士建。慶州人。系出新羅沙梁部。至我朝。司成汭用淸白顯。於公爲六代祖。父臣輔娶正言黃玎之孫女。隆慶戊辰生公。三歲母歿。十歲父卒。藐爾稚少。孝由天植。哀毁如成人。壬辰之亂。公與弟繼宗。從府判官朴毅長。在行間未知名。公之家在府南。賊數十百人屯據其中。公謂府尹尹仁涵曰。此去南村道左。有先人弊廬。聞賊聚其中。民雖駑怯。請先嘗之。尹壯而許之。公夜率蒼頭數十人。塞其門。乘風縱火。賊皆燒死。其從屋上穴隙而出者。輒射殺之無遺。盡得鳥銃槍劍。輸之官。府尹歎服。州人無不張膽而出。願從公討賊者幾五千。與同時應募金虎。設伏于彦陽境。斬獲甚衆。乘勝而前。遇賊於蘆谷。破之。及戰于鷄淵。虎中丸死。公不少挫。戰益力。以遏賊衝。慶之四封賴以妥帖。而上功之時。讓與戰士。故褒賞不及焉。甲午。登武科。授部將。以病辭。丁酉。賊復至。公率敢死軍數百。擊西生堡之賊射殪無算。公亦臍下中丸。顔色不少變。是年冬。天朝經略楊鎬與權元帥。共擊島山賊。時朴毅長爲府尹。忌公。誣以過犯。將斬之。經略素聞公名。救免之。公憤曰。我與其無辜而死。無寧死於國。馳入賊陣。丸洞右頰入左腮。歸而刮骨出丸人皆壯之。戊戌。參宣武原從功勳。受訓正資。李體察德馨大賚力戰壯士。擇一怒馬給公。辭曰。是賊入而屬官者。義不敢受。李相深加歎賞。庚子。上遣御史。犒慶蔚戰士以獎之。公與諸將士詣闕謝。上召至殿門外。問以討賊首尾及當今急務。公敷對甚悉。上嘉之。賜酒及弓矢。拜呂島萬戶兼宣傳官。皆不就。丁未。拜都摠都事。始就職。戊申。拜馬梁僉使。聲績大著。辛亥。拜慶尙虞候。甲寅。拜慶源府使。陞通政。勵操益堅。有氷檗聲。秩滿而歸。歷鏡城。判官李潤雨飾名妓侍公數月。終不回眄。潤雨歎曰。岳武穆何以加。兵使金景瑞見公復陶敝。製以新貂爲贐。公不受。庚申。李贊畫時發鎭平壤。引公爲別將。使將武士二百。屯良策。金兵卒至。公與褊裨誓曰。彼如轢蹙我。當死。金人竟不交兵而去伴臣誤聞于朝。公置對以實。編配蔚山。贊畫謂人曰。崔將軍橐如洗。必餓死牢中。以營布遺之。公辭曰。我罪重。安敢辱公周。癸亥反正。乃放還。拜加德僉使。李相敬輿爲御史時。極褒公淸勤。上特賜廏馬。明年。遷慶興府使。監兵使御史並皆褒奏。命加嘉善。庚午秋。特除工曹參判。冬。除京畿水使。上引見勞之曰。得淸簡者付畿閫。予無憂矣。及瓜。軍民願借。命兼三道統禦使。夏遷副摠管。甲戌。拜全羅水使。上又引見加慰而遣焉。丙子。朝廷有南牧憂。以公爲公州營將。居數月。南漢被圍。方伯鄭公世規率師勤王。愍公年老。以黃珀代之。公慨然曰。吾老不任將。能任行耳。遂揮泣從行。左右爲之感動。至龍仁險川。監司在後。公在前。鐵騎勢如風雨。軍中無人色。公植立不動。射不虛發。矢盡。顧謂從者曰。爾等不必從我死。我則不離此一寸而死。爾其識之。事定。諸孤得公屍於其處。矢集如蝟。面如生。死時年六十九。贈兵曹判書。諡貞武公。旌其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