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당 기 (欽欽堂 記)
주자(朱子)께서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펼쳐 풀이하며 ‘흠(欽)’ 자(字)를 첫 번째 뜻으로 삼았는데 후인들이 ‘성인의 덕은 이와 같을 뿐이다’라고 찬양하였으니, 오늘날 우리 종당(宗堂)이 ‘흠(欽)’ 자를 중히 여기는 것에 어찌 그 근본이 없겠는가.
옛날 우리 선조 정무공(貞武公) 잠와(潛窩) 선생이 인조 헌문왕의 두터운 인정을 받았던바, 생전에 ‘청렴한 신하를 경건하게 임용한다[廉謹叙欽]’는 칭송이 있었고, 사후에 ‘꿋꿋한 절개를 내가 흠모한다.[勁節予欽]’라는 제문을 내리니, 후손들이 여전히 임금 사랑을 우러르고 임금 은혜에 감격하여, 항상 편액에 눈길을 두고자 한다. 이에 대대로 살던 당(堂)을 ‘흠흠당(欽欽堂)’이라 하고, 문미(門楣)에 편액하여 인조 임금을 사모하는 정성을 담았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 이르러 당호를 ‘충의(忠義)’로 바꾸고, 옛 편액을 밀실에 갈무리해둔 지가 벌써 80여 년이다. 올해 봄에 사당을 수리하며 동쪽 협실까지 함께 중수했는데, 종군(宗君) 해일(海日)이 옛것을 좋아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뜻으로 옛 편액을 새로 고친 협실에 걸면서 나에게 한마디를 구하였다.
아! 우리 선조 우뚝한 충절 일월과 나란히 빛나고 천지와 함께 영원하니, 어찌 감히 말을 덧붙이겠는가. 그러나 당(堂) 이름 지은 뜻을 기문이 없으면 실로 무엇으로 징험하겠는가. 예로부터 당(堂)을 짓고 쓴 기문이야 수없이 많지만 모두 승경을 뽐내는 데 지나지 않았다. 우리 당(堂)이 직접 벽에 흙을 칠한 십세(十世) 후손들에 받들어져 선왕이 신린(臣鄰)을 예우한 뜻을 흠모하고, 선조(先祖)께서 충성 다해 임금 섬겼던 도를 흠모하며 변함없이 옛 자취 따르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지금 바다 건너온 무리에 의해 손과 발이 거꾸로 달린 모습을 보게 되니, 자정(自靖) 하여 스스로 멈추지 말고, 조종조(祖宗朝) 관화(關和)의 가르침을 더욱 강구 하며, 재물에 임해서는 청백(淸白)의 지조에 힘쓰고, 어려움 앞에서 구차히 모면하려는 뜻을 가지지 않는다면, 당을 이름한 실질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뜻은 종군(宗君)만 힘쓸 것이 아니라 여러 종친 또한 함께 힘써, 각각 흠흠(欽欽) 두 자를 하나의 본체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후에 영주의 대장간 같은 논의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기문을 쓴다.
갑인(甲寅, 1914)년 5월 하순에 십세손(十世孫) 현필(鉉弼) 삼가 쓰다.
*현필은 잠와선생의 4남 동길(東吉)의 후손이다. 문과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했던 승문원(承文晼)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구한말 혼란기를 맞아 짧은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경주에서 선비로 지냈다.
欽欽堂記
朱夫子釋帝典。以欽之一字。爲開卷第一義。後人之贊揚聖德。如斯而已。今我宗堂之重之以欽。豈無其本歟。昔我先祖貞武公潛窩先生。荷仁祖憲文王知遇之厚。生而有廉謹叙欽之褒。沒而有勁節予欽之祭。後嗣子孫猶能仰戴天眷感激恩寵。思所以常目在之。乃名其世居之堂曰欽欽。扁之于楣。以寓慕羶之誠。逮中古。易之以忠義。而舊扁則藏諸密室者已八十餘年矣。是歲之春。因廟宇補葺之役 並與堂之東夾。而重新之。宗君海日以好古追先之意。揭舊扁於新夾。要余以一言。噫。吾先祖危忠卓節。日月並朗。天壤俱獘。固何敢今日架疊。而若其堂顔命名之義。則不有記。實何從以徵之。從古有堂而有記者何限。而皆不過夸耀選勝之作。豈如斯堂之奉承於十世塗塈之後。欽先王禮遇臣隣之意。欽祖先盡忠事君之道。嗣以勿替循蹈舊撤之爲哉。見今乘海一翻。首足倒懸。居是堂者。勿以自靖而自沮。益講祖宗朝關和之訓。臨財而勵淸白之操。臨難而無苟免之志。則方可謂不負名堂之實。斯義也。不惟爲宗君勉之。且與闔門諸族共之。各以欽欽二字。爲一副當義諦。然後庶可免永州爐步之議矣。遂爲之記。
閼蓬攝提格姤之下澣。十世孫鉉弼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