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충의당 기문과 해석
충의당 기문과 해석


충의당 기 
(忠義堂 記) 

월성(月城) 남쪽 20리 부근 마을을 가암(佳巖)’이라 하니,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세거하는 곳으로 고() 정무공(貞武公) 최선생(崔先生)의 정려(旌閭)와 묘실(廟室)이 있다. 그 서쪽에 오가(五架)로 당()을 짓고 충의(忠義)로 편액한 곳이 대를 이은 후손 해일(海日)이 평소 사는 곳이다. 주인이 당()의 이름만 있고 실상을 기록한 기문이 없다 하며 나에게 한마디 부탁하니 말미에 붙인다.

! 그대 선조가 끼친 덕이 명산에 보관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고금 문장가들이 기리어 서술하여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것에 감히 한마디 덧붙이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짓인 줄 알지만, 고할 바 있는지 생각해 본다.

대체로 사람의 몸이 있으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쓰임이 있다.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잘 행하면 천지를 막아도 남음이 있으니, 사해(四海)의 기준으로 삼아도 다함이 없다. 이른바 하늘의 법칙, 땅의 도리라는 것으로 사람들의 떳떳한 본성이다. 누구나 할 수 있어서 세상이 항상 잘 다스려질 것 같지만, 기질에 잡혀서 속박되고 욕심에 이끌려 방탕하게 되니, 선악이 혼돈되지 않고 북쪽과 남쪽이 뒤집히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정무공(貞武公)의 위대한 충절은 진실로 이미 천지에 우뚝하고 일월처럼 빛나서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戒愼恐懼]에 힘을 다하고, 학문을 주고받으며 갈고 닦는 것[授受講磨]에 전심하였고, 효제(孝悌)의 다스림을 두텁게 하고, 사양하고 받는[辭受] 절도(節度)를 엄격히 하고, 출처의 마땅함을 조심하여 한마디 말과 행동도 소홀히 하지 않아 이루어진 것이다. 한때 우연함으로 갑자기 얻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더더욱 알아야 한다. 하물며 지금 온갖 나라들이 짐승처럼 먹는 형국이어서 임금의 형세가 위태롭고 나라 운명이 음울한 것이 임진(壬辰)년의 파천과 남한산성의 통곡에 비교할 바 아니다. 정무공께서 이런 상황에 계셨다면 애통함과 절박함이 응당 어떠하겠는가. 후인들은 마땅히 그 마음을 스승 삼고 그 도를 높여야 한다. 조정에 있어서는 나아가기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 쉽게 하는 의미[難進易退]를 강론하고, 초야로 물러나면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親上死長]마음을 돈독히 하여, 풍기(風氣)와 습속(習俗)에 유인되어 방해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좋고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도록 하라[無念爾祖 聿修厥德]’고 했고, 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고 했으니, 주인은 힘쓸지어다경자(庚子, 1900)년 맹추(孟秋) 종인(宗人) 익현(益鉉)이 쓰다.

*최익현은 호조참판과 경기관찰사를 지냈고 을사늑약을 맞창의한 유명한 의병장이다. 대마도에 유배되어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했다. 경주최씨이므로 문중사람[宗人] 익현(益鉉)이라고 썼다.

 

忠義堂記 

月城南二十里而近村曰佳巖慶州氏菟裘也故貞武崔先生㫌閭及廟室在焉就其西五架而堂額以忠義者嗣孫海日燕居之所也主人爲其徒名而無記實也屬余一言以尾之子之先德名山藏之輿地載焉古今詞翰家揄揚叙述備無餘蘊此而敢贅非愚則妄顧所告則有之蓋人有是身則有是心有是心則有是用經之爲三綱紀之爲五常塞乎天地而有餘準諸四海而不窮所謂天之經地之義而民之秉彜也宜若人皆可能世皆恒治而但氣拘而梏欲牽而蕩其不混淑慝而倒朔南者幾希矣若貞武先生之危忠大節固已軒天地炳日月不可尙已而考其所由則致力於戒愼恐懼之地專門於授受講磨之場敦孝悌之政嚴辭受之節謹出處之宜一言一動不容放過者有以致之非一時偶然而襲取之此尤不可不知也况今萬國獸食主勢孤危國步艱陰又非若壬辰去豳南漢痛哭之可比也使先生而在者其哀慟迫切當如何哉在後人地只當師其心尊其道進而在朝則講難進易退之義退而在野則篤親上死長之心不爲風氣習俗所誘引妨奪則斯不亦善之又善者乎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又曰夙興夜寐無忝爾所生主人其勉旃

 今上 三十七年 庚子 孟秋 宗人 益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