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사제문 (숙종 37년)
사제문 (숙종 37년)

賜祭文 (숙종 37년, 1711년)

숭정 후 67 년 신묘 10월 병진 삭 25일 경진,

국왕은 신하 예조정랑 정이규를 보내

() 정무공 최진립의 영령에게 제사를 내린다. 영령은

이름이 청백리로 알려졌고, 나라 위태롭자 그 절개 드러나니 아아! 장하도다. 나라의 준걸같은 선비로다.

초년에 붓 던지고 세상에 나타난 행적 매우 특별하도다두 조정 총애 예우 받으니 천추의 풍기를 만났구나.

난이 많은 때를 만나, 섬 오랑캐들 맹약을 저버렸네용 잠긴 못, 범 있는 굴에서 죽음 무릅쓰고 싸워 살아났도다.

찔린 상처 아물지 못했는데, 북쪽 군사들 또 이르렀구나임금님 옥좌를 옮겼고, 달무리가 외로운 성을 에웠도다.

주장이 적진으로 달려가며, 경을 늙었다 하니 임금의 치욕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어찌 나를 쓰지 않는가 하였네.

말을 채질하여 앞서 나가니, 그 뜻 빼앗지 못하였도다팔 척의 몸 심겨진 듯, 죽음만 있고 두 마음 없었네.

눈부신 태양과 빛을 다투고, 기개는 가을 하늘에 늠름하도다처음엔 의리를 떨쳤고, 마침내 인을 이루었네,

그 의와 그 인이여,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듯 여기는구나어디엔들 죽음 없으랴마는, 옳은 죽음 얻기 어렵도다.

충절이 둘도 없어, 사관들이 기록으로 남겼고또한 이미 마을에 정표하고, 역시 벼슬로도 포창하였네.

세월 지난 시골 터전에 충렬의 자취 두루 찾아옛 규례에 따라 붉은 편액으로 내려주노라.

내 지금 무릎을 치지만 구천에서 살아오기 어렵구나영웅의 혼 살아계신 듯하니, 이 맑은 술잔 밝게 흠향하시라.

 

* 이 사제문은 청액소와 사액한 사실의 기록 뒤에 실렸다. 제문에 錫以丹額등의 문구가 있다

崇禎後六十七年辛卯의 연조는 숭정 17년 갑신(인조 22년) 즉 명나라가 망한 그 다음해부터 기산한 것이다

이 사제문은 숙종 37년(1711년)에 새로 사액된 용산의 숭렬사우에 사제한 제문이다.

 

賜祭文 (肅宗 37年) 

維崇禎後六十七年歲次辛卯十月丙辰朔二十五日庚辰

國王遣臣禮曹正鄭以規

諭祭于卒貞武公崔震立之靈惟靈

名以淸聞節因危見嗟乎尙矣惟國之彦投筆初年發跡太奇兩朝恩禮千載風期

遭時多難卉服渝盟龍潭虎窟入死出生創瘢未泯北哨又及天移黼座月暈孤堞

元戎赴師謂卿老矣主辱謂何寧不我以鞭馬先出莫奪其志八尺如植有死無二

光爭白日氣凜秋旻始也奮義終也成仁其義其仁以歸視死何所無死得死難耳

忠節無兩太史書策亦旣旌閭亦旣褒爵暄凉丘宇冞尋烈跡式遵故實錫以丹額

予方拊髀九原難作英魂髣髴昭此泂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