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기(書院記) 여강 이익
근세에 계림의 최대부 정무공 선생은 하늘의 심겨준 바 지극히 바르며 시대의 밟아나간 바 지극히 어렵고, 그리고 공의 세워진 바 또 지극히 굳세고 지극히 커서, 무릇 국가의 전후 화란에 반드시 칼을 짚고 먼저 달려갔으며 달려갔으되 죽지않으매 뜻을 가다듬기 더욱 맵게 하였더니,험천의 싸움에 이르러서는 풍운이 캄캄하고 참혹하며 귀신이 놀라며 부르짖는데, 그런데 공은 마침내 화살과 칼날 아래에서 죽었으매.성주께서 들으시고 「내 신하를 두었다」이르시었고, 조정의 신하 조사석(趙師錫)은 아뢰되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일렀고, 아래로 장군에서 어리석은 지어미에 이르기까지「훌륭한 분이 돌아가셨다」말하지 않는 이 없었다.
사람이 칠척의 몸뚱이를 가져서, 귀·눈·사지의 행지하는 것이 남과 많이 같으나, 평생을 평평히 상고함에 미쳐서 선과 악의 같지 않음이 혹 천리처럼 멀어지니 어찌함일까? 하늘의 품부가 순함과 거스림의 구분이 있음이라. 순히 하면 해도 같이 달과도 같이 만물을 환하게 비쳐 모두 다 우러러 보고, 그렇지 않으면 이에 반대라、세상에 뛰어나고 큰 군자가 있어 마음 가지기 곧고 엄격하여 대사에 다다라 대의를 판별하여 물욕으로 해서 옮겨지지 않기, 자침이 껍질 안에 간직하여 있어 비록 백번 까부르고 천번 흔들려도 반드시 바른 방위를 가리켜 가히 호리라도 써 틀리지 못함과 같은지라. 이는 하늘의 품부한 바가 그러함이라. 풍부는 가히 써 헛되게 굳어지게 못함이 또한 무릇 그 사람의 형체와 기국의 받은 바가 만난 자리대로 곧 나타남과 같다.
당시에 이미 교명을 받자와 벼슬을 병조판서에 추증하였고 시호를 정무로 추증하였고 사당의 편액을 숭렬로 증여하시었으나, 그 뒤 인심의 사모하고 우러러 봄이 더욱 깊어 많은 선비 제제히 마루와 집을 별도로 세워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는 곳으로 하여 용산서원이라 이르니, 사람이 혹 의심하기를 고종과 서학의 혐의가 있을가 하나, 다 가로되 「그렇지 않다. 옛적 분보는 선비언마는 뇌사를 하였고 왕기는 아이었는데 상복을 하지 않았으니, 사람이 비상한 행이 있으면 반드시 비상으로써 보답하거든, 하물며 이런 윤강의 대의에 모든 심정의 사모함이 모였는데 어떻게 써 막아낼 수 있으랴? 또 영남의 끼쳐진 풍속으로 서악과 낙빈에 종종 증거가 있음이랴?」 이미 준공을 하자 그 정당에 이름하되 민고라 하고, 남북의 두 협실은 흥인, 명의라 이르고, 두 재사는 호덕과 유예로, 루는 청풍이라 이르고, 문은 식강이라 이르니, 이는 다 향선생 참의 정중기의 명명한 바였다.
익이 기억하건대 옛적에 가형 옥동 선생에게 가서 모시니, 좌중에 계림에서 온선비가 있어 편액의 큰 글자를 쓰도록 청하매, 선생이 즐겨 좇으신지 이제까지 오십여년인데, 노쇠하여 죽지 않아 살고 죽고 하였음을 느껴 생각하매 어제 일 같았더니 지금 최씨 사람 좋이 천리에 발섭하여 기술하는 문자로써 와서 부터 하니,익은 옛일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자라, 거룩한 자취를 세 번 되풀이하여 읽으니 절절이 누물을 빚이 줄줄 흐르는지라、드디어 삼가 기를 한다.
*여강(여주) 이씨 이익의 호는 성호(星湖). 대학자로서 천거에 의해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되었고, 나중에 노직(老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사석(趙師錫)은 현종 때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書院記 驪江 李瀷
人有七尺之軀。耳目肢體之動靜多與人同。及夷攷平生。其善惡之不同。或千里之遠。何哉。有天命順逆之分也。順之則如日如月。照徹萬物。衆皆仰覩。不然。反是。世有傑鉅君子。秉心直截。臨大事判大義。不爲物遷。如磁鍼藏在套中。雖百簸千撼。必指正方。不可毫釐以差也。此天之所命者然也。命不可以虛拘。亦惟夫其人之形器所受者。隨遇輒見也。近世雞林崔大夫貞武公先生。天之所植者至正。時之所蹈者至難。而公之所樹立。又至剛至大。凡前後國家之禍亂。必仗劍先赴。赴而不死。厲志愈烈。至險川之役。風雲黯慘。鬼神驚呼。而公則卒死於矢刃之下。聖主聞之曰。予有臣矣。廷臣師錫曰。國有人矣。下至販夫愚婦。莫不曰哲人亡矣。當時。已承命贈官兵曹判書。贈諡貞武。贈祠額崇烈。後人心之景仰彌深。多士濟濟。別立堂宇。爲聚集講學之所。曰龍山書院。人或疑瞽宗西學之有嫌。咸曰不然。昔賁父士焉而誄。汪踦童焉而不殤。人有非常之行。必以非常報之。况此倫綱大義。衆情萃慕。烏得以遏諸。且嶺外遺俗。西岳洛濱。種種有據乎。旣落成。扁其正堂曰敏古。南北兩夾曰興仁明義。兩齋曰好德游藝。樓曰淸風。門曰植綱。此皆鄕先生參議鄭公重器所命也。瀷記昔往侍家兄玉洞先生。座士有從雞林來者。求寫扁額大字。先生肯以從之。迄今五十餘年。衰老不死。感念存歿。如昨日事。今崔氏子宗謙。千里跋涉。以記實文字來託。瀷悅古樂善者也。三復偉蹟。節節釀淚蔌蔌下也。遂謹爲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