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을 창시한 사상가입니다. 호는 '수운(水雲)'이며 정무공의 4남 동길의 6대손입니다. 1824년 경주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유학자 근암 최옥(崔鋈)이며 모친은 곡산 한씨(한문헌의 녀)입니다. 어릴 때 이름은 최복술(崔福述)이고, 개명하기 전 이름은 '제선(濟宣)'입니다.
퇴계 학맥을 이은 부친으로부터 철저한 유학 교육을 받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습니다. 하지만 모친이 부친 최옥과 재혼하여 선생을 낳았기 때문에(즉 모친이 '재가녀'인 까닭에) 당시 법에 따라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열 살 때 모친을, 열 일곱에 부친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이후 처가가 있던 울산으로 이사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지만 곧 그만두게 됩니다. 의술(醫術)·복술(卜術) 등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장사꾼으로 전국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중국(청나라)을 굴복시킨 아편전쟁과 해안에 출몰하는 서양 이양선 소식을 듣고 쇠약해가는 나라와 삼정문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외세 침략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고위 관리들은 현실 파악조차 못하는 것을 보고, 요순과 공맹으로도 난국을 타파하기에 부족하다(堯舜之治 孔孟之德 不足焉)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사꾼으로 집 떠난 지 십 여 년 만에 울산 유곡동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까지는 사상가라기보다 나라와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간혹 기도에 매진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이 무렵 여러 사람에게 낸 빚으로 철점(소규모 제철소)을 운영하여 사업을 일으키려고 하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행에만 전념합니다. 이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꾸었습니다. '어리석음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1860년 4월 5일 조카 생일 잔치에 다녀오다가 길에 쓰러져 스스로를 '상제'라 부르는 존재의 소리를 듣고 대화하게 됩니다. 그 요지는 세상을 구하는 덕을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 1년 동안 수행하며 상제와 만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데, 마침내 고통 받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올바른 사상을 전파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집에 있던 두 명의 여자 노비를 각각 며느리와 양녀로 삼았고, 선생의 아내는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경산, 영천, 흥해, 영덕에서 많은 유학자가 스스로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집 주변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제자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선생이 창시한 동학은 백성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실천 방법으로 전파되어 엄청난 파급력을 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철저한 신분제의 조선 사회를 뒤흔들 동학의 평등 사상에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결국 1863년 선생을 잡아가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경상감영에서 처형했습니다.
동학은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신분질서 타파, 만민평등의 보편적 가치 실현을 추구하여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사상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든 동학혁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선생의 동학사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근대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생이 남긴 동학 경전은 한문 저술들을 엮은 "동경대전"과 한글 가사체로 된 "용담유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