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와 인물들질암 최벽
질암 최벽

질암(質菴)은 2파 동열의 후손으로 1783(정조 7)에 소과(小科)와 식년시 문과, 친림전시(親臨殿試)에 응시해서 갑과 1위로 급제했습니다. 즉 같은 해에 소과와 대과에 급제했는데, 대과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한 것입니다.  

부친은 종섭(宗燮)이며, 모친은 아주신씨(鵝州申氏, 신도하의 녀)입니. 부친은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했으며 대산 이상정(李象靖) 등과 많은 학문적인 왕래가 있었습니다. 

 문과 장원급제한 후 성균전적(成均典籍)에 제수되었고, 1784(정조 8)에는 예조좌랑(禮曺佐郞)에 천거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만 분주하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에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더 깊이 연구했습니다.

1790년에는 규장각초계문신(奎章閣抄啓文臣)으로 뽑혀서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는데, 이후에 사간원정(司諫院正)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에 제수되었습니다. 1800년 정조 승하 후에는 경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의 학풍은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도가(道家불가(佛家예수교 등의 이단을 배척했으며, 시경(詩經)에 대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문집으로 질암집(質菴集) 6권이 있습니다.

이 문집은 현손 해규(海奎) 등이 간행했는데, 시는 만사(輓詞)가 대부분이며 최흥원, 채제공에대한 것이 있습니다.

()에는 스승 이광정에게 보낸 문안서찰을 비롯하여 선배학자 정종로에게 보낸 문목이 있습니다.

() 중 문태극(問太極)은 태극과 심()의 관계를 설명한 논설로 노(), ()의 설을 성리학적 입장에서 비판했고 심()을 바르게 닦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사학(問邪學)은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한 내용으로 천주교에서 하느님만을 높이는 나머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길에 지나가는 사람과 같이 생각하라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경강의록(詩經講義錄)은 경연에서 정조에게 시강(侍講)한 기록입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경주 집경전(조선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중건해야 한다는 경주 민심을 대표하여 정조 임금에게 매우 강한 어조의 소(疏)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집경전이 중건되지는 못했지만 정조 임금의 어필로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집경전 옛터) 비석이 세워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