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文坡)는 3파 동량(東亮)의 후손으로 1884년 경주 교동에서 부친 현식(鉉軾), 모친 풍산 류씨(류도휘의 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현식은 대대로 이름난 만석꾼 경주최부자로서 진사에 입격한 뒤 경릉참봉, 산릉도감 감조관을 지냈습니다. 특히 국채보상경주단연회장으로서 경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문파는 경술국치 후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조달했으며, 특히 무장투쟁의 기치를 들고 출범한 대한광복회의 재무담당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는 그의 사촌 자형입니다.
문파는 3.1 운동 이전부터 안희제의 백산상회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했는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동생 최완을 통해 그 당시 돈 2만원의 군자금을 전달했습니다.
백산상회의 부채가 엄청난 금액으로 불어나자 이 부채를 떠 안고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하여 직접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엄청난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 경상합동은행 등에서 막대한 금액을 대출받아 중국의 백산무역 지점을 통해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금을 보냈는지 알 길이 없지만 1928년 백산무역이 완전 부도처리되었을 때, 최부자댁도 모든 재산이 압류되어 파산한 사실과 해방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자금의 6할이 백산으로부터 나왔다."는 말로 어림짐작 할 수 있습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경주군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광복 후 최부자댁은 원래 재산의 약 1/3을 되찾았는데, 문파는 이를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기관 설립에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1945년 지역 유지 20여 명과 함께 경북종합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고, 이를 기반으로 1947년 (구)대구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또 한국전쟁 시기에는 경주로 피난 온 교수들과 학생들을 위해 경주 교동에 초급대학을 세웠습니다. 이 대학은 1959년 대구여자대학으로 전환되어 (구)대구대학 재단에 통합되었습니다.
문파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재단에 귀속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집과 선산, 심지어 일가 친척들 집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에 교촌마을과 내남면 일대의 많은 집, 토지, 임야가 대학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은 1964년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맡겨져 3년간 운영되었는데 사카린사건 직후 설립자 최준의 동의없이 박정희 대통령 개인에게 헌납되었습니다. (구)대구대학은 1967년 청구대학과 통합되어 현재의 영남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사후에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주어졌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