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공파(가암파)정무공 잠와 선생
정무공 잠와 선생

공은 1568년 경주 현곡 하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贈참판 최신보)과 모친(평해 황씨, 황임종의 녀)을 일찍 여의셨는데 모친을 세살 때 잃고 새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열살 때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외가가 있던 내남면 이조리로 이사하여 성장했고, 오촌 당숙되는 진사(進士) 최신린(崔臣隣)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스물 다섯 되던 해(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침입해 오자 동생 최계종과 함께 가솔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글공부 하던 선비가 급히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워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자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왜적이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내남면 노곡과 울주군 열박재에서 경주 의병 대장 김호 장군과 함께 적을 격퇴하여 첫 승리를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부대를 이끌고 영천성, 경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1594년에는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종6품 부장으로 무관이 됩니다.
정유재란(1597)으로 왜군이 다시 대규모로 쳐들어 오자 결사대 백여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서 많은 적을 무찔렀습니다. 이 때 공은 배 아래쪽에 적의 탄환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사기가 꺽이지 않고 곧바로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싸웠습니다. 공의 용맹으로 사기가 충천한 결사대는 적을 대파했습니다. 얼마뒤 조선과 명나라는 도산성(울산성)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대규모 공격을 하게 되는데, 공은 권율 장군 휘하로 참전하여 맹활약했습니다. 이 전공으로 선무원종이등((宣武原從二等)으로 공신이 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육군과 수군을 오가며 변방 수비에 충실한 무관 생활을 하면서 청장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휘하 부대를 항상 기강이 살아있고 잘 준비된 군대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고, 이런 생활로 상관과 동료, 심지어 부하 병사까지 청렴하고 성실한 최고의 무관으로 공을 평가했습니다. 여도만호 겸 선전관, 훈련원 부정, 오위도총부 도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함경도 경흥도호부사로 재직하던 중에는 청렴한 관리로 선정을 베풀어 1628년과 1629년 등 두 차례 포상을 받았습니다. 공조참판을 거쳐 경기수사 겸 삼도수군통어사, 교동도호부사를 거쳐, 1633년 가선대부 행 용양위 부호군덕원도호부사, 1634년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습니다. 
1636년 충청도 공주영장(公州營將)에 제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으로 후금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된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 험천(현재 용인시 죽전동)에 이르러 적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다 순절했습니다. 전사한 공의 시신에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최후에 이르러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과 종들에게 후퇴를 명했으나 공의 종들, 옥동과 기별은 물러나지 않고 함께 전사했다고 합니다.  
순절 후 청백리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두차례의 국난을 맞아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것을 표현한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국왕이 직접 사제문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우게 했으며 경주 용산서원(龍山書院) 등에 배향되었습니다. 사후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 건립에는 당파에 상관없이 노론과 남인 모두 참여해서 범국가적으로 공을 추모했습니다.